백두대간 사람들 27 대덕산 조령과 죽령을 잇는 여우목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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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12,347회 작성일 18-08-28 11:18본문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전설조차 사치스러운 것인가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어 살아가는 대미산이나, 마을 안 마당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의 내력을 남의 일 말하듯 했다. 고개와 마을을 여우목이라 부르게 된 연유도 여우목 사람들은 들려주지 못했다. 한 뼘 논과 두 뼘 담배밭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그들에게서 길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노역의 고통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늘을 치장하는 데 쓰일 전설과 역사보다는 당장 비가 그치면 돌봐야 할 담배밭 이랑과 다락논 물꼬가 더 중요했다.
마을을 통틀어야 겨우 6가구. 해마다 수확이라곤 빚을 늘리는 것뿐이지만 그나마 농사꾼이라 부를 수 있는 가구는 3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3가구는 나물 등을 뜯거나 정부의 배급으로 삶을 이어간다.
나물을 뜯고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삶을 주민 정일수(50)씨는 “산천을 파먹는다”고 표현했다. 말투에서 사투리가 들리지 않는다. 부초처럼 떠돌던 삶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직 4계절을 맞지 않았다고 한다. 부칠 땅 한 평 없는 고향이지만 그래도 객지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외지생활을 청산했다.
“저 고갯길이 포장되고 나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요.” 정씨의 기억은 지난 봄을 더듬고 있었다. 매년 봄이면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오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봄은 유독 많았다고 한다. “실업자가 늘었잖어. 길도 좋아지고.” 마을의 대소사를 가리는 윤문형(60)씨가 곁에서 나름대로 해석을 갖다 붙인다. “이제 보세요. 내년에 나물이 나나.” 산이 인간에게 주는 것들은 먹고 살 만큼만 뜯고 캐야 한다는 것을 정씨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화전을 부쳐 먹기가 좋아 많은 이들이 토막집을 짓고 비탈에 불을 놓던 시절 대미산은 소나무밭이었다고 한다. ‘잘살아보자’는 노랫소리가 새벽잠을 깨우던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무렵 그 많던 소나무는 사라졌다. 산판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수 십년, 대미산은 울창한 모습을 되찾았지만 정씨의 어린 시절 지천이었던 송이버섯을 지금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마을에서 송이가 언제 나는지 어디서 나는지 아는 사람조차 없다. 인근 마을에서 송이버섯으로 수백만원에서 천만원대에 이르는 소득을 올린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을 안에 들어선 하얀 십자가도 남의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앞에는 ‘천주교 성지 여우목’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1801년 신유교난이 터지면서 충청도 지방 천주교 신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이때 일부가 백두대간을 병풍처럼 두른 문경지방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문경지방의 험준한 산악지형은 관의 눈길을 피해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에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충청지방을 연결하는 요로인 문경새재가 지척이라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다른 신자들과 연결하기에 좋은 지리적 여건도 갖추고 있었다.
여우목 마을도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곳이다. 기록은 1600년경에 장씨 성을 쓰는 단양사람이 다래덤불을 거두고 정착하면서부터 여우목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이전부터 터전을 닦았던 토착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토착민들은 천주교 신자들과 같은 처지였을지도 모른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여우목 고개의 서쪽인 지금의 평천일대에는 ‘벌천부곡’이 있었고, 동쪽 아래 동로면 지역에는 ‘동로평소’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 소, 부곡은 전쟁포로나 죄인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살던 곳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옹기점이나 무쇠솥을 만들던 쇠점의 흔적은 천민거주지의 전통이 조선조까지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수탈과 억압, 그리고 차별을 숙명처럼 이고 살아가던 토착민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이라는 천주교 신자들의 말은 희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망나니의 시퍼런 칼춤을 부추길 때 여우목 마을에서도 많은 이들이 붙잡혀갔지만 막상 처형된 것은 회장을 맡았던 이윤일(요한성인, 천주교 103위 순교자)씨뿐이었다고 한다. 기록은 이때 붙잡혀간 이들이 “관장의 아량으로 배교를 하지 않고도 풀려 났다”(<문경지>)고 적고 있지만 믿기 어렵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 ‘서학쟁이’라는 죄 아닌 죄로 목이 잘려 나간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젖먹이까지도 죽임을 당했는데 유독 여우목의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은혜가 베풀어졌다고는 믿기 어렵다. 오히려 이때 풀려 난 이들이 있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토착민들이었을 것이다.
여우목에 천주교 신자들이 떠난 지는 이미 오래다. 윤씨는 신부가 찾아오고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다. 4대를 여우목 마을에서 살았지만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지난해 세워진 십자가 돌보기를 자신의 논을 돌보듯 한다. 어쩌다 찾아오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마을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일도 그에게는 기쁨이다. “돈 한푼 나오는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내 마을 찾아오는 사람을 모른 척하느냐”는 윤씨의 넉넉한 인심의 내력에는, 어쩌면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를 위험에도 천주교 신자들을 몰라라 하지 않았던 옛 사람들의 의리와 정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마른 가뭄’에 속타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빗줄기는 굵어진다. 타는 들을 바라보던 농부들은 “비료 세 번보다 나은 비”라며 반겼다. 낮에 오는 비는 ‘하인비’, 밤에 오는 비는 ‘주인비’라는 설명을 들은 것은 여우목 고개를 넘어서였다.
‘연주패옥’형의 명당 중의 명당이 있다는 생달마을에는 지난 정월대보름에 쳤다는 금줄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옥녀가 화장을 하기 위해 목걸이를 풀어 놓은 형국의 명당 연주패옥에 묘를 쓰면 금관자, 옥관자를 쓰는 훌륭한 후손들이 많이 태어난다는 명당이지만 아직 그곳에 들어선 묘는 없다. 정확한 위치를 아는 이가 없는 탓이다.
명당은 임진왜란 때 귀화한 당나라 장수가 당시 은혜를 베푼 정탁대감을 위해 잡아준 것이라고 한다. 당의 장수는 그 자리를 자신을 수행하던 정대감의 하인에게 일러주었다고 한다. 뒷날 정대감의 아들이 그 하인을 앞세우고 명당을 찾았으나 명당을 백보 이내에 두고 갑자기 뒷걸음질 치는 말에 하인이 그만 밟혀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야기로 전하는 연주패옥의 위치가 비밀로 남게 된 내력이다. 350여년 됐다는 소나무 아래에는 이때 화가 난 정대감의 아들이 죽인 말의 무덤이라는 봉분이 남아 있다.
생달마을 들머리 금줄에는 짚으로 만든 말이 여우목 고개쪽을 바라본 채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함께 매달았던 짚신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왜 말과 짚신을 금줄에 매다는지 자신있게 설명하는 이는 만날 수 없었다. 금줄의 말과 짚신은 당시 죽은 하인과 말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원혼을 달래는 것은 오랜 시절 이어온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아니면 천년보다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여우목 고개의 내력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우목 고개는 신라가 연 하늘재와 함께 시작해 하늘재가 그 역할을 문경새재에 넘긴 뒤까지 이어졌다. 조선조 말에 간행된 <경상북도예천읍지>에는 여우목 고개를 ‘조령과 죽령을 잇는 목젖과 같은 교통의 요지’라고 적고 있다.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동부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여우목을 지나야 했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저마다 수많은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금줄에 짚신과 말을 매단 것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나그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더 많은 이들이 고개를 넘나들며 마을에 번영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을 수도 있다. 이제 서울로 가기 위해 여우목을 넘는 사람들은 드물다. 길은 사통팔달 뚫렸고 인심도 길을 따라 흩어지고 있다. 여우목 고개의 역사를 가리고 찾는 것은 역사가들의 몫이지만 고개를 따라 오롯이 피었을 인심을 되찾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7-대덕산-조령과-죽령을-잇는-여우목-고개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마을을 통틀어야 겨우 6가구. 해마다 수확이라곤 빚을 늘리는 것뿐이지만 그나마 농사꾼이라 부를 수 있는 가구는 3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3가구는 나물 등을 뜯거나 정부의 배급으로 삶을 이어간다.
나물을 뜯고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삶을 주민 정일수(50)씨는 “산천을 파먹는다”고 표현했다. 말투에서 사투리가 들리지 않는다. 부초처럼 떠돌던 삶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직 4계절을 맞지 않았다고 한다. 부칠 땅 한 평 없는 고향이지만 그래도 객지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외지생활을 청산했다.
“저 고갯길이 포장되고 나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요.” 정씨의 기억은 지난 봄을 더듬고 있었다. 매년 봄이면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오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봄은 유독 많았다고 한다. “실업자가 늘었잖어. 길도 좋아지고.” 마을의 대소사를 가리는 윤문형(60)씨가 곁에서 나름대로 해석을 갖다 붙인다. “이제 보세요. 내년에 나물이 나나.” 산이 인간에게 주는 것들은 먹고 살 만큼만 뜯고 캐야 한다는 것을 정씨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화전을 부쳐 먹기가 좋아 많은 이들이 토막집을 짓고 비탈에 불을 놓던 시절 대미산은 소나무밭이었다고 한다. ‘잘살아보자’는 노랫소리가 새벽잠을 깨우던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무렵 그 많던 소나무는 사라졌다. 산판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수 십년, 대미산은 울창한 모습을 되찾았지만 정씨의 어린 시절 지천이었던 송이버섯을 지금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마을에서 송이가 언제 나는지 어디서 나는지 아는 사람조차 없다. 인근 마을에서 송이버섯으로 수백만원에서 천만원대에 이르는 소득을 올린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을 안에 들어선 하얀 십자가도 남의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앞에는 ‘천주교 성지 여우목’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1801년 신유교난이 터지면서 충청도 지방 천주교 신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이때 일부가 백두대간을 병풍처럼 두른 문경지방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문경지방의 험준한 산악지형은 관의 눈길을 피해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에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충청지방을 연결하는 요로인 문경새재가 지척이라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다른 신자들과 연결하기에 좋은 지리적 여건도 갖추고 있었다.
여우목 마을도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곳이다. 기록은 1600년경에 장씨 성을 쓰는 단양사람이 다래덤불을 거두고 정착하면서부터 여우목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이전부터 터전을 닦았던 토착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토착민들은 천주교 신자들과 같은 처지였을지도 모른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여우목 고개의 서쪽인 지금의 평천일대에는 ‘벌천부곡’이 있었고, 동쪽 아래 동로면 지역에는 ‘동로평소’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 소, 부곡은 전쟁포로나 죄인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살던 곳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옹기점이나 무쇠솥을 만들던 쇠점의 흔적은 천민거주지의 전통이 조선조까지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수탈과 억압, 그리고 차별을 숙명처럼 이고 살아가던 토착민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이라는 천주교 신자들의 말은 희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망나니의 시퍼런 칼춤을 부추길 때 여우목 마을에서도 많은 이들이 붙잡혀갔지만 막상 처형된 것은 회장을 맡았던 이윤일(요한성인, 천주교 103위 순교자)씨뿐이었다고 한다. 기록은 이때 붙잡혀간 이들이 “관장의 아량으로 배교를 하지 않고도 풀려 났다”(<문경지>)고 적고 있지만 믿기 어렵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 ‘서학쟁이’라는 죄 아닌 죄로 목이 잘려 나간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젖먹이까지도 죽임을 당했는데 유독 여우목의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은혜가 베풀어졌다고는 믿기 어렵다. 오히려 이때 풀려 난 이들이 있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토착민들이었을 것이다.
여우목에 천주교 신자들이 떠난 지는 이미 오래다. 윤씨는 신부가 찾아오고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다. 4대를 여우목 마을에서 살았지만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지난해 세워진 십자가 돌보기를 자신의 논을 돌보듯 한다. 어쩌다 찾아오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마을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일도 그에게는 기쁨이다. “돈 한푼 나오는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내 마을 찾아오는 사람을 모른 척하느냐”는 윤씨의 넉넉한 인심의 내력에는, 어쩌면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를 위험에도 천주교 신자들을 몰라라 하지 않았던 옛 사람들의 의리와 정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마른 가뭄’에 속타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빗줄기는 굵어진다. 타는 들을 바라보던 농부들은 “비료 세 번보다 나은 비”라며 반겼다. 낮에 오는 비는 ‘하인비’, 밤에 오는 비는 ‘주인비’라는 설명을 들은 것은 여우목 고개를 넘어서였다.
‘연주패옥’형의 명당 중의 명당이 있다는 생달마을에는 지난 정월대보름에 쳤다는 금줄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옥녀가 화장을 하기 위해 목걸이를 풀어 놓은 형국의 명당 연주패옥에 묘를 쓰면 금관자, 옥관자를 쓰는 훌륭한 후손들이 많이 태어난다는 명당이지만 아직 그곳에 들어선 묘는 없다. 정확한 위치를 아는 이가 없는 탓이다.
명당은 임진왜란 때 귀화한 당나라 장수가 당시 은혜를 베푼 정탁대감을 위해 잡아준 것이라고 한다. 당의 장수는 그 자리를 자신을 수행하던 정대감의 하인에게 일러주었다고 한다. 뒷날 정대감의 아들이 그 하인을 앞세우고 명당을 찾았으나 명당을 백보 이내에 두고 갑자기 뒷걸음질 치는 말에 하인이 그만 밟혀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야기로 전하는 연주패옥의 위치가 비밀로 남게 된 내력이다. 350여년 됐다는 소나무 아래에는 이때 화가 난 정대감의 아들이 죽인 말의 무덤이라는 봉분이 남아 있다.
생달마을 들머리 금줄에는 짚으로 만든 말이 여우목 고개쪽을 바라본 채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함께 매달았던 짚신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왜 말과 짚신을 금줄에 매다는지 자신있게 설명하는 이는 만날 수 없었다. 금줄의 말과 짚신은 당시 죽은 하인과 말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원혼을 달래는 것은 오랜 시절 이어온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아니면 천년보다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여우목 고개의 내력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우목 고개는 신라가 연 하늘재와 함께 시작해 하늘재가 그 역할을 문경새재에 넘긴 뒤까지 이어졌다. 조선조 말에 간행된 <경상북도예천읍지>에는 여우목 고개를 ‘조령과 죽령을 잇는 목젖과 같은 교통의 요지’라고 적고 있다.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동부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여우목을 지나야 했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저마다 수많은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금줄에 짚신과 말을 매단 것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나그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더 많은 이들이 고개를 넘나들며 마을에 번영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을 수도 있다. 이제 서울로 가기 위해 여우목을 넘는 사람들은 드물다. 길은 사통팔달 뚫렸고 인심도 길을 따라 흩어지고 있다. 여우목 고개의 역사를 가리고 찾는 것은 역사가들의 몫이지만 고개를 따라 오롯이 피었을 인심을 되찾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7-대덕산-조령과-죽령을-잇는-여우목-고개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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