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곁으로 편히 가십시오
작성일 18-08-0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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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강 조회 84,316회 댓글 0건본문
고산자 곁으로 편히 가십시오
최 선 웅
형님, 이 곳은 생전에 형님이 자주 찾으셨던 ‘마야’입니다. 안주없이 맥주만 파는 작은 술집말입니다. 마야가 그려진 벽걸이 아래로 오밀조밀 세워둔 술병과 낡은 나무 탁자, 연신 담배를 피워무는 뚱보 여주인 등등 이 술집의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형님과 마주 앉으면 항상 ‘우리 땅, 산줄기, 물줄기, 고지도’가 화두였고, 탁자 한 켠에 맥주병이 늘어날 때면 주위는 아랑곳없이 가뜩이나 큰 형님의 목소리는 더 커져만 가고, 끝날 줄 모르는 얘기는 언제나 술집 문 닫을 때까지 계속 되었었죠.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은 형님의 구부정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 맥주 한 잔 하면서 형님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따져보니 형님을 만난지도 33년이나 되었군요. 「산수」잡지 같이 하자고 하시던 때가 1968년이었으니까요. 무슨 운명같이 저도 그 때 「등산」을 창간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을 때였죠. 형님도 생각나실 겁니다. 잡지 등록번호는 「산수」가 라-1157호로 「등산」(라-1158호, 지금의 월간 「산」지)보다 바로 앞 번호였는데 창간은 「등산」이 한 달 빨랐죠.
그 때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형님은 편집으로 참여했다가 도중에 전주가 물러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행까지 맡게 되셨고, 초장부터 제작비가 모자라 친구들 호주머니를 털었고, 그래도 안되면 두 달치 합본을 내었고, 급기야는 연간 발행 권수를 채우지 못해 문공부로부터 폐간통보를 받았잖습니까. 제가 하던 「등산」도 어떻게든 폐간은 면하려고 12월호를 납본용으로 얄팍하게 20부만 찍었었죠.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 제가 지도제작을 하고 있을 때, 형님도 지도 만드신다고 쫓아 다니셨잖습니까. 결국 10년만에 또 같은 일을 하게 된 셈이 됐지요. 그 때 형님이 만드셨던 ‘제주도관광지도’가 국립지리원으로부터 불법지도로 고발되어 대한민국 최초로 형사입건이 되는 사건이 있었죠. 도하 신문지상에 형님을 옹호하는 기사가 나가자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형님은 그 사건으로 인해 일약 ‘현대판 고산자’라고 유명인이 되어 매스컴을 타기도 했었죠.
아마 그 사건이 형님과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인연을 맺는 운명적 만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도 그 당시 조정에서 본다면 불법지도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죠. 나라에서조차 만들지 못했던 조선 땅의 정확한 지도를 보잘 것 없는 하층계급의 목각쟁이가 만들어 냈으니 대역죄인으로 몰아도 당한 도리가 없었겠죠. 형님이 그토록 알아내려고 애썼던 김정호 선생의 생몰연대가 거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후로 형님은 고산자에 매료되어 대동여지도와 씨름하느라 어지간히 애를 쓰셨고, 잘 풀리지 않는다고 방안 가득히 대동여지도를 펴놓고, 고산자와 술잔을 주고 받으며 고산자의 혼을 불러서라도 의문을 풀어 보려고 하셨던 형님은 스스로 제주가 되시어 지도하는 사람, 고지도 연구하는 사람, 민학하는 사람들 불러 모아 사상 유례없는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제사를 두 번이나 모셨잖습니까. 그리고 대동여지도를 복간한다고 얼마나 동분서주 하셨습니까. 전국 곳곳에 소장되어 있는 20여 본의 대동여지도 원본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분석 검토한 끝에 인쇄원판을 만들고, 옛스럽게 표갑에 싸서 복간한 대동여지도는 벌써 희귀본이 되어 고서점에서 고가에 거래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끔 형님은 말씀하셨었죠. 지도쟁이는 옛날의 김정호나 지금의 우리나 생각은 꼭 같을 것이라고요. 그래서 형님은 역사학자나 서지학자의 눈이 아닌 지도쟁이의 눈으로 대동여지도 를 읽어내려고 고심하셨고 결국 대동여지도의 편찬방법, 제작방법 등을 낱낱이 캐내어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연구보고서도 내셨습니다. 무엇보다 지도쟁이의 생각으로 지도쟁이의 눈으로 대동여지도의 숨겨진 사실들을 밝혀냈다는 것을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높이 평가해야 될 학문적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김정호 단원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각계를 찾아다니며 좀처럼 수정하기 어려운 내용을 바로 잡으셨던 형님의 올곧은 성품은 형님이 하시던 출판사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올바른 뜻으로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광우당(匡祐堂)이라 지었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요즘 종주산행 붐을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도 따지고 보면 형님으로 하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부터 우리 땅의 산줄기, 물줄기에 대한 고유의 산수경론이 일제 때 일인 학자에 의해 지질구조에 의한 산맥론으로 회자된 것으로 형님이 바로 잡으려고 글쓰시고, 강연 다니시며 우리 산줄기를 알리려고 얼마나 애 쓰셨습니까.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형님의 대단한 업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현재까지 숭실대학박물관에 한 장 밖에 없었다던 대동여지도 목판을 찾아내셨던 일 말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실시한 고지도 조사사업에 참여하시어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깊숙이 잠자고 있었던 수십 장의 대동여지도 목판을 찾아 낸 것은 형님의 혜안이 아니었던들 가능했겠습니까. 충분히 특종감이 될 만한 그 사건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던 관계로 책임론 때문에 쉬쉬하고 보도제한을 하고 말았으나 형님은 그 목판을 본 것만으로도 김정호 선생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동여지도 제작에 대한 의문점이 다소나마 풀렸다고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예상밖으로 목판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목판의 두께도 1센티미터가 넘지 않았으며, 그것도 앞뒤로 판각을 하였고, 여백을 최대한 이용하여 옹색하게 다른 도엽을 판각했다는 사실은 김정호가 목판을 쉽게 구할 수 없어 입수되는 대로 판각했으며, 재료를 아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여실하다는 것 등을 밝혀 내시고, 결론적으로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이 어렵사리 제작해냈다는 추정도 형님이 아닌들 누가 풀어 냈겠습니까.
형님 장례식 때 박물관에 계신 학예사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고지도를 정리하고 고증할 때 꼭 계셔야 할 분인데 너무 빨리 가셨다”고 못내 애석해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형님은 아직 할 일이 많으셨고, 형님이 아니면 풀어낼 수 없는 난제들이 많았는데 왜 그리 서둘러서 떠나셔야 했습니까.
작년만 해도 그동안 공부하고 알아낸 것들을 정리하여 ‘우리 땅 산줄기 물줄기’에 대한 책을 펴내 잘못 알려져 있는 우리의 산수경을 정리하시겠다고 의욕이 대단해잖습니까. 아마 세월이 지나가면서 형님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두고 두고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꿈, 못다 이룬 뜻 그대로 간직하시고 생전에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시던 고산자 선생의 곁으로 편히 가십시오.
* 최선웅 : 44년 만주 장춘에서 났다. (주)매핑코리아 대표이며 현재 한국산악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다. 1969년 국내 첫 등산잡지인 「등산」을 창간한 바 있으며, 1988년에 지도 전문 제작 회사인 <코리아오토매핑>이름으로 설립,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 「사람과 산」 200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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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 덧붙임) 고 이우형 선생님에 대한 부분은 추후 추가 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신 최선웅님은 2017년에 대동여지도에 한글을 함께 표기하고 필요한 지명에 해설을 붙인 <해설 대동여지도>와 대동여지도에 한글을 함께 표기하고 65% 축쇄된 <한글 대동여지도>를 출간했습니다. <한글 대동여지도>는 직접 이어붙이면 전국지도가 만들어져 대동여지도의 진면목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최선웅님은 오랜 소원이 비로소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일독을 권합니다.
최 선 웅
형님, 이 곳은 생전에 형님이 자주 찾으셨던 ‘마야’입니다. 안주없이 맥주만 파는 작은 술집말입니다. 마야가 그려진 벽걸이 아래로 오밀조밀 세워둔 술병과 낡은 나무 탁자, 연신 담배를 피워무는 뚱보 여주인 등등 이 술집의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형님과 마주 앉으면 항상 ‘우리 땅, 산줄기, 물줄기, 고지도’가 화두였고, 탁자 한 켠에 맥주병이 늘어날 때면 주위는 아랑곳없이 가뜩이나 큰 형님의 목소리는 더 커져만 가고, 끝날 줄 모르는 얘기는 언제나 술집 문 닫을 때까지 계속 되었었죠.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은 형님의 구부정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 맥주 한 잔 하면서 형님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따져보니 형님을 만난지도 33년이나 되었군요. 「산수」잡지 같이 하자고 하시던 때가 1968년이었으니까요. 무슨 운명같이 저도 그 때 「등산」을 창간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을 때였죠. 형님도 생각나실 겁니다. 잡지 등록번호는 「산수」가 라-1157호로 「등산」(라-1158호, 지금의 월간 「산」지)보다 바로 앞 번호였는데 창간은 「등산」이 한 달 빨랐죠.
그 때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형님은 편집으로 참여했다가 도중에 전주가 물러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행까지 맡게 되셨고, 초장부터 제작비가 모자라 친구들 호주머니를 털었고, 그래도 안되면 두 달치 합본을 내었고, 급기야는 연간 발행 권수를 채우지 못해 문공부로부터 폐간통보를 받았잖습니까. 제가 하던 「등산」도 어떻게든 폐간은 면하려고 12월호를 납본용으로 얄팍하게 20부만 찍었었죠.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 제가 지도제작을 하고 있을 때, 형님도 지도 만드신다고 쫓아 다니셨잖습니까. 결국 10년만에 또 같은 일을 하게 된 셈이 됐지요. 그 때 형님이 만드셨던 ‘제주도관광지도’가 국립지리원으로부터 불법지도로 고발되어 대한민국 최초로 형사입건이 되는 사건이 있었죠. 도하 신문지상에 형님을 옹호하는 기사가 나가자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형님은 그 사건으로 인해 일약 ‘현대판 고산자’라고 유명인이 되어 매스컴을 타기도 했었죠.
아마 그 사건이 형님과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인연을 맺는 운명적 만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도 그 당시 조정에서 본다면 불법지도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죠. 나라에서조차 만들지 못했던 조선 땅의 정확한 지도를 보잘 것 없는 하층계급의 목각쟁이가 만들어 냈으니 대역죄인으로 몰아도 당한 도리가 없었겠죠. 형님이 그토록 알아내려고 애썼던 김정호 선생의 생몰연대가 거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후로 형님은 고산자에 매료되어 대동여지도와 씨름하느라 어지간히 애를 쓰셨고, 잘 풀리지 않는다고 방안 가득히 대동여지도를 펴놓고, 고산자와 술잔을 주고 받으며 고산자의 혼을 불러서라도 의문을 풀어 보려고 하셨던 형님은 스스로 제주가 되시어 지도하는 사람, 고지도 연구하는 사람, 민학하는 사람들 불러 모아 사상 유례없는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제사를 두 번이나 모셨잖습니까. 그리고 대동여지도를 복간한다고 얼마나 동분서주 하셨습니까. 전국 곳곳에 소장되어 있는 20여 본의 대동여지도 원본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분석 검토한 끝에 인쇄원판을 만들고, 옛스럽게 표갑에 싸서 복간한 대동여지도는 벌써 희귀본이 되어 고서점에서 고가에 거래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끔 형님은 말씀하셨었죠. 지도쟁이는 옛날의 김정호나 지금의 우리나 생각은 꼭 같을 것이라고요. 그래서 형님은 역사학자나 서지학자의 눈이 아닌 지도쟁이의 눈으로 대동여지도 를 읽어내려고 고심하셨고 결국 대동여지도의 편찬방법, 제작방법 등을 낱낱이 캐내어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연구보고서도 내셨습니다. 무엇보다 지도쟁이의 생각으로 지도쟁이의 눈으로 대동여지도의 숨겨진 사실들을 밝혀냈다는 것을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높이 평가해야 될 학문적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김정호 단원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각계를 찾아다니며 좀처럼 수정하기 어려운 내용을 바로 잡으셨던 형님의 올곧은 성품은 형님이 하시던 출판사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올바른 뜻으로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광우당(匡祐堂)이라 지었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요즘 종주산행 붐을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도 따지고 보면 형님으로 하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부터 우리 땅의 산줄기, 물줄기에 대한 고유의 산수경론이 일제 때 일인 학자에 의해 지질구조에 의한 산맥론으로 회자된 것으로 형님이 바로 잡으려고 글쓰시고, 강연 다니시며 우리 산줄기를 알리려고 얼마나 애 쓰셨습니까.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형님의 대단한 업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현재까지 숭실대학박물관에 한 장 밖에 없었다던 대동여지도 목판을 찾아내셨던 일 말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실시한 고지도 조사사업에 참여하시어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깊숙이 잠자고 있었던 수십 장의 대동여지도 목판을 찾아 낸 것은 형님의 혜안이 아니었던들 가능했겠습니까. 충분히 특종감이 될 만한 그 사건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던 관계로 책임론 때문에 쉬쉬하고 보도제한을 하고 말았으나 형님은 그 목판을 본 것만으로도 김정호 선생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동여지도 제작에 대한 의문점이 다소나마 풀렸다고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예상밖으로 목판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목판의 두께도 1센티미터가 넘지 않았으며, 그것도 앞뒤로 판각을 하였고, 여백을 최대한 이용하여 옹색하게 다른 도엽을 판각했다는 사실은 김정호가 목판을 쉽게 구할 수 없어 입수되는 대로 판각했으며, 재료를 아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여실하다는 것 등을 밝혀 내시고, 결론적으로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이 어렵사리 제작해냈다는 추정도 형님이 아닌들 누가 풀어 냈겠습니까.
형님 장례식 때 박물관에 계신 학예사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고지도를 정리하고 고증할 때 꼭 계셔야 할 분인데 너무 빨리 가셨다”고 못내 애석해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형님은 아직 할 일이 많으셨고, 형님이 아니면 풀어낼 수 없는 난제들이 많았는데 왜 그리 서둘러서 떠나셔야 했습니까.
작년만 해도 그동안 공부하고 알아낸 것들을 정리하여 ‘우리 땅 산줄기 물줄기’에 대한 책을 펴내 잘못 알려져 있는 우리의 산수경을 정리하시겠다고 의욕이 대단해잖습니까. 아마 세월이 지나가면서 형님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두고 두고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꿈, 못다 이룬 뜻 그대로 간직하시고 생전에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시던 고산자 선생의 곁으로 편히 가십시오.
* 최선웅 : 44년 만주 장춘에서 났다. (주)매핑코리아 대표이며 현재 한국산악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다. 1969년 국내 첫 등산잡지인 「등산」을 창간한 바 있으며, 1988년에 지도 전문 제작 회사인 <코리아오토매핑>이름으로 설립,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 「사람과 산」 200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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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 덧붙임) 고 이우형 선생님에 대한 부분은 추후 추가 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신 최선웅님은 2017년에 대동여지도에 한글을 함께 표기하고 필요한 지명에 해설을 붙인 <해설 대동여지도>와 대동여지도에 한글을 함께 표기하고 65% 축쇄된 <한글 대동여지도>를 출간했습니다. <한글 대동여지도>는 직접 이어붙이면 전국지도가 만들어져 대동여지도의 진면목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최선웅님은 오랜 소원이 비로소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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